전도를 하다 보면 교회에서, 목사에게서, 상처받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실에 대한 억울함이 뇌리 가운데 깊이 고착되어 있으면, 반드시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이 상처를 받도록 유발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래서 저래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소리가 만연합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 받았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약해져 시험 들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내 감정이 중요하고, 내 주장과 생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너도 나도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상처’입니다.
이 상처라는 단어는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의미가 많이 들어 있기에, 여러 가지 나쁜 영향을 줍니다. 멀쩡한 감정을 왜곡되게 하고, 우울한 기분과 죄책감의 방어기재가 되고, 그냥 듣고 넘어갈 말도 기분이 상했다고 곱씹으며, 퇴행성 행동장애와 부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상처라는 말은, 오늘날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이지, 예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쉽게 ‘나는 누구에게 상처 받았다. 나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하고 지난 과거의 아픔을 토로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사람들이 ‘나’라는 자기중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상처는 현대 상담학이 만들어낸 인본주의의 단어입니다. 과학적 이론의 상담학이 우리에게 좋은 도구도 되었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사고로 이끌어가고, 미래지향적보다 과거로 깊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상처라는 말은 신앙인들에게 신중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재를 살지 않고, 지난 과거에 붙잡혀 살게 하는 사탄의 도구가 상처라는 느낌인데, 계속 나에게 집착하고 중독되어,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마음에 무거운 납덩어리로 남아 있으면, 쓴 뿌리가 될 뿐이며, 장래를 망치는 원인이 그때 그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기적인 사람이 상처를 잘 받습니다. 눈만 뜨면 계속 ‘내 돈, 내 물건, 내 가족, 내 자녀, 내 성공, 내 앞길, 내 목적’에만 관심을 갖고 집중하면, 결코 만족감이나 행복이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내가 나에게 계속 집중하면, 내 안에 부정성, 공격성, 어두움이 싹트기 시작하기 때문에 또 다시 쉽게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상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상처입은 분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도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상처를 허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픈 상처가 영적생활에 보화이며, 고난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알려줍니다.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만드는 역설과 특별한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계속 상처라는 말을 곱씹으면, 문제에 대해 항상 핑계와 변명과 합리화만 늘어놓고, 당연한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제부터 ‘그때 상처받았다’ 하지 말고, ‘아! 그때 그 일로 내가 거룩을 회복하였다’고 표현하는 자유함과 넉넉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