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설득력 있는 말이나 특별한 재능과 어떤 새로운 지식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신뢰는 그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 보는 삶을 묵묵히 실천할 때 생기게 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고상한 말과, 남다른 재능과 새로운 지식을 설파할 수 있지만, 만약 희생과 손해 보는 삶이 없다면, 자기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공허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희생과 손해 보는 삶을 살면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희생과 손해 봄을 통해, 의도하는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목사가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자신의 목회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 목사의 희생은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치르는 희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희생이니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이나, 교회를 위해, 교회식구들의 유익 때문에 희생하거나 손해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코 희생과 손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럴싸한 비전을 제시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을 주어도, 희생과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동의와 협력을 구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그 비전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다쳐 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희생과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교회는 이래야 한다.’, ‘성도는 이래야 한다.’, 혹은 ‘목사는 이래야 하고, 장로는 이래야 한다.’는 말을 뜬금없이 하면, 그 말이 아무리 맞는 것 같아도 듣기는 듣지만 마음에 간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무개념의 주장이고, 자기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오만한 태도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희생하고 손해보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목장을 위해 희생하고 손해 보는 자리에 부르신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서로 격려하며, 존중하고, 희생과 손해 봄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서로 섬기며, 힘껏 응원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일꾼, 신뢰받는 사역자들로 세워지려면, 희생과 손해를 봐도 묵묵히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3-16).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결국 주님의 제자인 우리가 손해보고 희생하는 사역자들이 되면,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자동으로 인생은 정리됩니다. 그때는 붙들고 버려야 할 것이 분명해지고, 더 이상 허탄한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한된 시간 앞에서 낭비하는 인생에 대해 선을 긋게 됩니다. 자기 영혼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희생과 수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육체의 장막에 거하는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고, 희생과 손해 보는 삶을 통해 신뢰를 쌓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 다 희생과 손해로 인한 선한 열매 많이 맺고, 끝까지 감사하는 삶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