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사실에 진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사실을 사실로 받아 드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실이 오히려 분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져주어야 합니다.
옛날에 고집이 센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고집이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하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습니다. 둘 사이의 다툼이 가당 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했고, 그 둘은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원님이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이 센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4×7=27이라 하였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원님이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을 열대 쳐라!’ 그 판결을 듣고 고집이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는 곤장을 맞으면서 원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이 대답했습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 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한다.’
젊었을 때 저의 모습은 ‘28’ 이라고 목숨 걸고 지켜 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7’이라고 해도 넘어가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27’이라고 주장하고 억지를 부려도, 언젠가는 ‘아! 28 맞구나’ 할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면 될 것을, 죽어라 고집 부리는 사람을 상대하여 자기의 옳음을 관철시켜 갈등을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어리석고 무식한 것입니다. 양보하고 져준다고 하여 사실(4×7=28)이 변한 것도 아닌데 기어이 이겨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갈등을 만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당장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양보하여 화평을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주변과 더불어 잘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양보하고 져준다고 사실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서도 다투는 것이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일어납니다. ego problem입니다.
어떤 경우 든 극단적, 과격성의 말은 맞아도 틀렸습니다. ‘절대’란 복음과 하나님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맞지 않아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우리들 됩시다. (장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