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을 비유하여, 공사 중에 있다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당장은 불편하지만 언젠가 그 공사가 끝날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을 겸손한 태도로 바라보면서 조급한 마음으로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부만을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을 특정한 유형으로 규정짓고, 내가 원하는 어떤 ‘프레임’에 딱 가두어버리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면의 감정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탐심이 많고, 어떤 사람은 교만하고,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하고, 어떤 사람은 인색하여 자기밖에 모르지만, 정도가 다를 뿐이지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애성 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짐작으로 남의 생각을 모두 안다는 착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대부분의 생각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수용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는 자가 믿음 있는 자입니다.
우리들이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나무가 똑바로 서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삐뚤어진 나무도 멋이 있습니다. 그래서 분재를 할 때 일부러 철사로 삐뚤어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못된 나무가 산을 지키고, 노송은 풍파로 휘어져 있는 그 자체가 멋이 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나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될 때까지 하나하나 조금씩 고치시고, 단련시켜 성장하도록 변화시킵니다. 굳은 생각도 나쁜 습관도 고정관념도, 환경과 인간관계를 통해 조금씩 계속 고쳐 성화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공보다 성실을 원하시고, 결과보다 과정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성격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장애현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복음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저는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좋습니다. 배려는 상대방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고, 복음을 위해 영적 어깨동무를 하고, 손에 손을 잡고 짧은 인생길에 행복한 동행이 되려면, 받아 주고, 품어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견디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교회 안에 단 한 사람도 없고 우리 모두가 다 쓸모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도 교회 안에서는 버릴 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냉소와 비난은 금물입니다.
삶은 전부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는 병원이고,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은 항상 공사 중에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해서 고치려 하지 말고, 눈감아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받아드리는 공감방식이 존중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넘어갈 때, 그 이후는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