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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원죄가 무엇입니까?

전도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중에 세상 공부를 많이 한 철학적 지식이 아주 깊은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해박한 철학적 지식과 논리적 사고로 복음에 대한 관심은 없고, 계속 역질문 공세를 펴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창세기 3장의 사건인 [원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그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될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원죄에 대한 분명한 해석만 해 주면 자기는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풀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공감이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성령님께 기도했습니다. 원죄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 사람이 알아듣고, 복음에 수긍하고 마음 문이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한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삐딱한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원죄를 설명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원죄라는 것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하여 [삐딱한 성질]로 거부 반응을 하는 것이 바로 원죄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분의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아무래도 제가 원죄 탓인 것 같습니다. 왜 항상 모든 일에 삐딱한 생각을 하는지 이제야 알았다고 하면서, 삐딱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왜 계속 하게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바로 원죄 때문이군요.” 하며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그 삐딱한 성질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 보려는 자기주장의 의지와 사고’라고 했더니, 그분의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다 알기 전에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는 바로 이 생각이 원죄에서 비롯되는 것이군요.’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을 했습니다.

이분은 꽤 인상적으로 복음을 받아 드렸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질문이 너무 많고, 삶을 살아가는데 복잡한 사연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약속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이 배워서 아주 유능한 척하다가 무지를 자초하고, 스스로 제법 똑똑한 줄로 착각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고, 무조건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빼뚤어진 고정관념의 사고 때문에 스스로 마음 문을 닫고, 고통스러워하는 정신 장애자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상대방의 마음에 강압적으로 꾸겨 넣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대화할 수 있는 접촉점을 열어 주실 때 “삐딱한 성질”이라는 그 한 마디가 기억이 나서 소통을 가능하게 했듯이, 전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기도하고 겸손한 자세가 되면 성경 말씀 외에도 뜻밖에 말을 기억나게 해서, 그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해보고 말해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장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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