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복수라는 말 그 자체가 좋은 뉘앙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복수를 하면서, 자신은 복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 이유는 복수라고 하면, 큰 피해를 입히거나 죽이는 일을 복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소극적인 복수가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복수하는 줄도 모르고 반복해서 복수를 하고 지냅니다.
복수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힘이 들도록 뭔가를 갚아 주는 것만이 복수가 아닙니다.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소극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따라 무엇인가를 안 함으로써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때를 소심한 복수라고 합니다.
소극적인 소심한 복수 대상은 가까운 배우자나 가족들 중에 혹은 부모나 시부모나 처가가 될 수 있고, 자녀나 동기간이 될 수 있고, 교회식구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불편하게 하면, 감정이 상해 되갚아 주려는 침묵과 어깃장 놓는 말과 싫은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소극적 복수입니다.
교회에서 누구에게 자존심이 상했을 때 교회에 안 나오는 것, 목장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목장에 안 모이는 것,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모임을 주관할 때 그 모임에 안 나가는 것, 당연히 해 주어야 되는 일이 있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 해 주는 것은 소극적 복수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데 그 사람이 미우면 열심히 안 하는 것, 장사를 하면서 그 손님이 얄밉게 느껴져서 살짝 가격을 높게 받는 것, 남들은 다 디스카운트 해 주는데 그 사람이 모르고 있으니까 말하지 않고 일부러 제 가격 받는 것, 앞에서는 괜찮은 척 웃으면서 뒤에 돌아서서 다른 사람에게 온갖 비판 불평 비난을 쏟아 놓는 것도 소극적 복수입니다.
불편한 마음이 들면 카톡방에서 말없이 빠져나가거나, 질문을 해도 내 마음에 안 들면 묵묵부답으로 잠수를 타는 것, 동의를 하면서도, ‘네…’ 하고 …을 찍어 자기 존재의 감정을 표시하고 토를 다는 것, 전화가 와도 일부러 받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것, 평소에 인사를 잘 하다가도 기분 나쁘면 다른 데를 처다 보면서 관심 없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 모두가 다 소극적인 복수입니다.
십일조를 드리 다가도 재정적으로 조금 어려우면 액수를 줄이거나 안 하는 것, 어떤 상황이 꼬이고 어렵거나 힘들면 기도나 예배가 싫어 지는 것은 하나님께 소극적으로 복수하는 것이고, 내가 아니면 그 일 제대로 돌아가는지 한 번 보겠다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 강단에서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나의 아픈 부분을 찌를 때 화가 나고 시험이 드는 것은 목사에게나 하나님께 소극적으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소심한 복수를 자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 정서로 서서히 성품과 인격이 파괴됩니다. 당장은 아무런 일이 없는 것 같아도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삶은 더욱 죄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여도 소극적인 복수를 할 때 죄가 쌓입니다. 당장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받아도 소심한 복수를 꿈꾸지 않고 긍정적으로 좋게 반응하면, 결국 평안과 함께 영적 내공이 쌓이게 됩니다. 영혼이 잘 되려면 소극적인 복수를 즉시 멈추어야 합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