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 충만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의지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덧입지 않으면, 태도와 자세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충만을 사모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다 이겨냈다고 생각하는 악습들에 또 다시 넘어질 수 있고, 뻔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옛 구습의 사고방식으로 또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체험이 성령 충만 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압도적인 초자연적 임재가 있을 때 성령 충만을 느낄 수 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임하는 것을 느낄 때, 성령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어떤 강렬하고 신비한 체험이 있어야만 성령 충만은 아닙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는 것만이 성령 충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울부짖고 바닥에 뒹굴고 황홀하여 손발을 떨고, 기절하듯 넘어지는 것만이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신비한 체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신비한 체험만이 성령 충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어떤 신비한 체험이 없어도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품과 삶의 변화를 모두 성령 충만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 역시, 뭔가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 종교인들도 도덕적인 성품과 윤리적 삶의 변화가 어떤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니,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최영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성령 충만을 정의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나 세상의 관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삶에서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는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의와 공감이 되는 정의입니다. 성령 충만의 어떤 체험을 했다지만, 만약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랑과 지혜와 헌신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는(갈2:20), 사도바울의 고백과 결단이 성령 충만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성령 충만의 특별한 체험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꾸 어떤 체험만을 사모하면 그 체험이 없을 때 신앙의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고, 계속해서 그 체험 자체에만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 충만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께 모든 불신앙의 핑계를 다 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불편하고,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반복적으로 해 보면 점점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 이건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되는구나!” 하는 고백이 나올 때,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