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아니면 저것의 사고방식은 무엇이든 갈라놓기 때문에 신앙공동체에서는 위험합니다. 집중하고 협력해야 할 표현감각을 파편화시키고 신앙의 전체성과 경이감을 형편없이 파괴할 개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논리의 영역 너머에 있는 신비에 대한 신앙의 문제에, 민주적 방법의 찬반론이나 옳다 틀렸다는 이분법을 적용하려 들면, 그것이 늘 우리를 오도하거나 선악과가 되어 반대급부가 예기치 않게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진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세상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것과 저것 모두를 포용하는 곳에서 발견됩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어떤 것을 알려고 한다면, 이 세상을 파편화 하는 분리 방식으로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역설의 양극은 배터리의 양극과 같습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서로 합쳐질 때 생명의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만약 이 양극을 서로 떼어놓으면, 전혀 전류는 흐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율법적으로 딱 부러지게 이것저것으로 양극을 서로 떼어 놓으면 한 순간에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들숨만 쉬고 날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의 신체적 건강에 결정적인 손상이 오듯이, 살아 있는 역설을 논리로 분리시키는 것은 우리의 지성, 감성, 영혼의 안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진리로 살고자 하는 신앙생활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논리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일치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양극을 조화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업을 부여 받습니다. 인간관계를 선과 악으로 규정하고 끊어내고, 잘라내면 온전해질 것 같아도, 잠시 지나면 오히려 내가 나를 소외시켜 고립시키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양극단을 초월하는 수준에 있는 강력한 힘이 진리입니다. 다양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해가 안 되도 일단 받아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이 힘이 나에게 먼저 작동될 때 이것, 저것 양극을 포용하여 품고 성령께 맡길 수 있으며, 사랑의 힘은 더 강력하게 발생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미덕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고,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시기하고, 자랑하고, 무례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싫어서 안 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럽습니다. 사랑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끝이 좋을 것을 기대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낯선 것을 만나거나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렸을 때, 어느 시점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논리적 선택의 유혹이 있을 때, 관용하는 관대한 마음으로 ‘나는 이미 하나 되기로 작정했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격려하며 사랑의 힘을 택해야 합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똑 같은 ‘하나’로 창조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한, 내가 원하는 ‘하나’는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내려놓게 하는 생각의 연습과 세상 기준을 벗어나, 통합된 수용성과 상호연결성을 중시하는 ‘관대함’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최고이고, 사랑만이 남습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