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기는 것이 목표이고, 지는 것은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패배자는 어느 한 곳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한 사람을 환영하지, 패배자를 환영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억지를 부리면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역설이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 성공을 위해서는 나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잘 져 줄 수 있고, 잘 져 주는 법을 잘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결국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매번 우리를 대할 때 이기려고 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한계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더 가치 있고, 예수님의 순종이 세상의 어떤 지략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으며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기도해 주고 최선의 마음으로 섬김을 해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 시간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핑계대는 사람들, 자신의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너’의 모습만이 아니고, ‘내’안에 있는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져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교회는 져주는 법을 연습하도록 합니다.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는 사람은, 삶의 자리에서 패배의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으로 인해 어려움과 아픔을 계속 경험해도, 예상치 못하는 넘어짐의 순간에서도, 평소에 져 주는 연습을 통해 아픔과 상처가 충분히 단련되었기에 극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잘 져 주기 위해서는 관대해야 합니다. 그 관대함은 무조건 내가 옳다는 맹신의 사슬을 끊고, 유치한 감상을 배제하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나를 죽이는 자아성찰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면서 상처 받지 않는 자기존중감이 있는 사람만이 관대할 수 있습니다.
섬김은 누군가를 돕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져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편한 상대로 여기고, 하기 어려운 말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누군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져주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분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무능과 약점 연약함 그리고 실수와 실패가 있어도, 져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태연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길 수 있는데도 져주고 속상한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하소연하고, 또 다시 져 주기로 연습하는 곳이 예배의 자리입니다.
때로는 억울하지만, 바보 같지만 져주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옳음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의 틀을 매일 기도로 깨트리고, 경건함이 유지되려면 져주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를 죽이고 져 주기로 작정하면 바람직한 두려움의 경건은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