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가 이름을 정할 때 특정 신학자의 이름을 넣는데, 우리 CRC 교단 신학교는 칼빈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이끌 미래 지도자들을 양성함에 있어서, 칼빈의 신학과 사상이 신학교의 비전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고, 신학교의 특별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CRC교단에 소속된 교회는 칼빈이 누구였으며, 그는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학문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세속적인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 듯 무심하고 냉정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무게감 있는 설교나 강연을 전하는 학자라는 인상을 풍깁니다. 실제로 칼빈은 다소 지배적이고 통제적인 성향이 있지만, 자신의 지성에 대한 탁월성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예정’이나, ‘선택’과 같은 어렵고 논쟁적인 교리와 연관 지어 연상하고, 하나님의 강압적인 명령과 인간의 무능력에 집착한 신학자로, 자기 부인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 모두를 불편하게 하거나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 잔소리꾼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며, 우리 삶이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하나님 사랑을 향한 분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보면, 너무나 자비롭고, 따뜻하며 목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신앙을 견고하게 하며, 고난 속에 위로를 주고, 삶을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신학이 단지 지식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교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기쁨과 감동을 누릴 수 있는 메시지가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언약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 목적은 신학적 논쟁을 위함이 아니고, 교회와 성도의 믿음을 굳게 세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확신시켜 주며, 고난 가운데서도 용기를 주는 것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과 시련에 대한 소망과 인내를 형성하는 살아 있는 약속이 그 내용의 중심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깊은 고난 속에서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확고히 하고, 따라서 언약은 깊은 위로의 샘이 됩니다. 칼빈의 교리는 믿음의 신자들에게 기쁨과 소망, 평안과 확신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영적인 선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고난 받는 이를 위로하고, 믿음에서 흔들리는 이에게 확신을 주고, 지친 이를 일으켜 세우며,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세상의 공공선을 위하여 영적싸움을 해야 한다는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차가운 논리로 분노를 품는 논쟁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덕을 세우려 했던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교리와 신학을 단순한 지적 유희로 여기지 않고, 교리 속에 담긴 따뜻함을 기억하고, 언약과 약속으로 여전히 자기 백성과 사랑으로 자신을 묶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신학의 특징입니다.
우리 교회가 매주 수요일 예배와 토요일 새벽기도 때 CRC 교단과 칼빈 신학교와 총회와 노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특정 신학과 교단에 몰입하자는 것이 아니며, 우리 교회가 소속된 교단과 신학에 대한 애정과 헌신의 표현이며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하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 칼빈 신학교인가를 어느 정도 안다면, 우리가 영적 쇄신을 위해 간절한 외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장목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