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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나쁘고 복음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우리 목사님이 율법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불만을 토로했던 분이 다니는 교회 웹사이트에 가서 설교를 들어 봤습니다. 율법적인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은 율법주의적인 설교라고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내면에 숨겨진 죄로 인해 찔림을 받고 시험이 들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똑 같은 설교를 듣고 죄에 대해 애통함을 느끼며,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분에게는 율법적인 설교가 아니고 복음설교가 아니겠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격려를 받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만 복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거나,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키우는 악령에 동조하는 영적현상에 붙잡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가 율법적인가 복음적인가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진단입니다. 병이 들면 먼저 진단이 필요하듯이, 진단 없는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죄가 죄임을 깨닫게 되어야 치유와 회복이 됩니다. 따라서 율법이 없으면, 당연히 복음은 필요 없습니다. 죄가 악인 줄 모릅니다. 죄를 죄어도 후회만 하고 또 동일한 죄를 즐기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더한다는 로마서5장 20절은, 난해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죄를 조장한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지만, 구원으로 달려가게 하는 율법이 없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얼마나 귀한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율법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으면 복음은 속임수입니다. 율법을 싫어하는 복음주의는 자칫하다 소비자주의(consumerism)가 될 수 있습니다. 위로 받고, 격려 받고, 인정받고, 필요를 채우고, 지식을 배우고, 항상 뭘 얻을까 생각하고, 사명을 위해 헌신과 희생이 싫고, 무사안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율법은 좋으나, 율법주의는 믿음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그 반면에 복음은 좋으나, 복음주의는 자칫하면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말끝마다 주여! 주여!, 할렐루야! 아멘! 외치면서, ‘주님의 은혜로’를 외치고, 행함의 수고와 헌신이 없으면 율법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설교가 복음적이라도 본인이 들을 때는 율법주의라고 우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착한 사람인 줄 알면 자주 반복해서 시험이 듭니다. 기쁨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율법주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기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것이고, 기쁨으로 하는 자발적 순종이 진짜 복음주의입니다. 죄의 삶은 제한과 한계로 끌고 갑니다. 복음의 삶은 무제한이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죄사함 받고, 어떤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건강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장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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