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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남에게 뭔가를 해 줄 때 더 깊은 쾌감을 느낍니다.

원래 사람은 뭔가를 받을 때보다 뭔가를 해 줄 때 더 깊은 쾌감을 느낍니다. 쾌감이라는 말은 행복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한 일을 할 때와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을 줄 때 내가 나의 마음에 주는 보상입니다.

조건 없이 내가 어떤 사람에게 좋게 해 주는 것이 좋아서, 그래서 뭔가를 해 주고 잊어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건강한 신앙 밝은 자아상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서는, 그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공존 상통해야 건강한 소통이 되는데, 문제는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사랑받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감정이 상해도 잘 해 주는 것은 오히려 서로에게 부정적 감정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된 호의가 계속되면, 처음에는 고마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책 없이 호의를 제공하는 것은 서로 간에 관계가 끊어질 개연성이 있어서 마지막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인 호의는 냉정하게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호의를 베풀 것이니, 너는 그 이후를 준비하라고 하는 ‘선’을 미리 정해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자립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사람이 성장하도록 도우려면 지나친 애착관계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섬겨도, 한계를 정해 놓지 않고 내 감정의 만족을 위해 시작하면, 상대방의 인생이 내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면 좋겠지만, 더 이상 섬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면 오히려 서로 불편한 관계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냥 호의를 계속 베풀면, 받는 사람은 거기에 의존하게 되고, 나중에 호의가 끊길 때는 상처받았다며 원망을 하게 됩니다. 안 해도 되지만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있고, 해야 되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호의를 베풀 때 어디 까지를 정해 놓지 않으면, 안하고 싶은데 억지로 해서 힘이 들고, 서로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 때문에 감정이 상하게 되며, 그 호의를 받는 상대는 처음처럼 나의 성의가 없음을 알고 냉소적인 반응을 하게 됩니다.

군집을 이루는 자연의 세계는 적당하고 적절한 간격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나무들도 햇빛을 고루 받아야 건강하게 자라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으로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잘 해 주고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기 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까 봐,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양보하고 자기 영역을 내주다 보면, 처음 시작한 섬김의 관계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불편한 부담이 되고 맙니다. 남을 돕고 섬김을 시작할 때, 자기 능력의 한계를 정하고, ‘여기까지’ 하겠다는 경계선을 세우면 신나게 돕고 보답 받지 않아도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목사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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