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내가 너보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만함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거스르게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분명히 옳았습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과 다르고, 세리와 달랐습니다. 이틀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정확히 드리고, 심지어 푸성귀까지 십일조를 바쳤으니 분명히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그가 옳다 함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바리새인처럼 항상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와 입장과 상황과 이유를 막론하고, 어차피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며, 나 혼자 옳음을 독점하는 그 순간,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순식간에 저급한 옳음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옳을 때 당당합니다. 그래서 양보하지 못하고 싸웁니다. 그 당당함을 계속 주장하면, 더 이상 옳음은 옳음이 아니고 치명적인 틀림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아서 상대방이 정죄감과 죄책감과 깊은 상처를 받게 되면, 한 영혼을 실족케 하는 위험한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옳으시면서 우리를 대하실 때는 절절 매는 사랑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잘 나타납니다. 너는 틀렸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둘째 아들에게 잘해 주려고 절절 매는 아버지의 모습에 화가 난 큰 아들은 정말 옳았지만, 누가 봐도 옳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창녀 짓하는 고멜을 용서하고, 돈 주고 다시 사오고, 아내로 인정해 준 호세아는 옳았습니다. 음란하고 가출한 고멜은 파렴치한 죄로 인해 버림 받아도 마땅한 여자였고, 100% 틀렸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옳으면서도 절절 매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틀린 사람을 보면서 화가 날 때가 신앙생활에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삶의 위기는 오히려 내가 옳았을 때 시작됩니다. 나의 옳음이 강조되는 그 순간,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정죄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때 사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동체를 깨려고 달려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친 옳음의 주장은 옳지 않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의로 인해 상처를 받아도 처음처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전혀 옳은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죽이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인해, 옳지 않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으니, 옳다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옳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려면, 옳으면서도 절절 매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의 옳음이 지나치면 안하무인이 되고 한 순간에 추락하는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 100% 옳음은 그 누구도 없고,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 가는 죄인이고, 교회는 틀려도 사랑으로 포용하는 곳이며, 천국 갈 때까지 치료받고 회복되는 병원입니다. 그래서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장목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