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용어 중에 ‘조해리 창’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할 때 인간관계에는 4가지 창문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창,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창, 나는 모르고 너는 아는 창,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창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정된 대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4가지 창의 영역을 인정하고 상호 경계를 지켜야 하며, 이 창을 함부로 넘어서지 말고 서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서로 이해해야 하고, 친밀한 사이에서도 일정하게 지켜야 할 기본적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른 마음의 창이 있기 때문에, 무례하게 그 영역을 침범하면 공격받는 느낌과 불편한 감정으로 인해 갈등이 유발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서로의 기본적 경계를 인정해 주고, 가능한 한 그 경계를 내 마음대로 넘나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 그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해, 뜻이 좋기 때문에, 본인에게 유익이 됨으로, 해보면 좋으니까, 억지로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주장은 결정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와 같다고 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강가에 살면서 길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놓고 쇠로 만든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여행자의 다리를 잡아당겨 침대에 맞추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침대 크기에 맞도록 다리를 잘라 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강요하거나 고치려 하여 고통을 주는 사람을 ‘프로크루스테스’ 와 닮았다고 합니다. 이는 내가 세상과 상대방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를 상징하는데, 그 잣대는 근거 없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생긴 심리적 기준입니다.
내 생각에 맞춰 다른 사람을 멋대로 재단하는 사람의 횡포에 비유하는 이 말은, 모든 일의 주도권을 내가 잡아야 된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방은 기쁨으로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잠시 동안 그 조종 욕구에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주도권을 잡고, 내 뜻대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싶은 심리의 배후에는 악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이기적인 주도권 함정에 습관적으로 빠져 있으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감추어진 공격성으로 결국 자기자신을 다쳐주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자기는 정당하다는 듯 계속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고쳐보려는 마음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조급함은 마귀적 영적 현상이니 그 사람이 실수를 해도 넉넉히 받아주고, 당장 내 생각으로 고치려는 주도권을 내려놓고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게 됩니다.
‘조해리 창’ 네 번째 창인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창’은, 성령께서 주도하는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너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내 주장을 내려놓고, 기도해 주고 섬기면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장목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