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모든 아름다운 것은 희생에서 나옵니다. 꽃이 보기에 아름답고, 숲이 보기에 아름답고, 동물들이 보기에 아름다워도 처음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아픔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만물 가운데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처음 나올 때 희생이 있었기에 그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능력과 아름다움은 희생에서 나옵니다. 정말 바쁜 사람이 자기 시간을 쪼개어 이웃의 이삿짐을 거들어 줄 때, 한 달을 빠듯하게 사는 사람이 이웃에게 물질로 베풀 때, 자기 몸도 좋지 않은데 필요가 보이면 지체하지 않고 달려갈 때,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럴 때 속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을 주는 섬김에는 언제나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역에 희생이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시간이 남아서 섬긴다든지 내 것 다 쓰고 남은 물질로 섬기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할 때 그 교회의 생명력은 떠나갑니다. 교회가 희생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에서는 더 이상 영적인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뜨거운 찬양을 드리고 수준 높고 좋은 말씀이 선포되어도 희생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죽어갑니다.
교회에서 몸을 사리기 시작하는 징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섬기는 자리에서 무슨 말들이 오가는 지를 살펴보면 압니다. ‘부담스러워, 대충해, 이 정도면 됐어, 적당히 해, 그렇게 많이 하면 뒷사람이 부담스러워져,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등의 말이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영적인 위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교회는 섬김이 넘쳐나야 합니다. 섬기되 감동을 주기까지 희생이 들어가는 섬길 때 비로소 운동력을 발휘합니다. 섬김이 몸에 밴 교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요란하지 않지만 강합니다. 분주하지 않지만 진합니다. 열심보다 열정이 있습니다. 표정이 밝습니다. 소수가 방방 뛰지 않고 적재적소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럴 때 이곳저곳에서 열매가 있고 아름다움이 넘쳐 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지체로 일해야 합니다. 세밀하고 치밀한 정성이 작은 것 하나에도 깃들어 있도록 희생이 따르는 섬김을 해야 합니다. 대충하는 익숙함을 거부해야 합니다. 어떤 일의 시작과 과정과 마무리에 기도가 스며들게 해야 하고,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고, 그 섬김을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조금씩 섬김의 내공이 서서히 깊어지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본을 보이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완성품으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해서 훈련되면 더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희생이 없으면 능력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행복한 신앙생활, 밝고 맑은 교회는 희생 없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보람과 기쁨을 맛 본 분들이 희생하는 자리에서 웃을 때 목사는 기쁩니다. 불평하지 않고, 경직된 얼굴이 아니라 웃으면서 희생하며 섬기는 분들을 볼 때 목사는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 분위기를 잃지 않는 한 우리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섬김을 통해 감동을 받고, 희생을 통해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