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본능적 자아로 인함이면, 육적인 사람이고 자기애적 인격장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고 나는 존귀한 자, 사랑받는 자, 행복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해도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자신을 ‘천국 시민권’을 가지 존재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존귀한 자’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우리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과 몸을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의 값을 주고 샀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죽이시고, 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면, 나는 굉장한 존재이고 엄청난 신분을 소유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일정한 암묵적 평가와 판단을 내리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세상은 이러하다’라는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을 삽니다. 그렇게 부여된 의미를 통해 현실을 경험하는데, 만약 자신에 대한 의미가 잘못 부여되었다면, 잘못된 그 의미를 정정한다 거나 혼자의 힘으로 고착된 그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이 당연히 일차적이지만,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미부여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의지적으로 칭찬과 인정과 격려와 사랑으로 의미부여를 진실한 마음으로 반복하게 되면, 서서히 지금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의미부여로 공헌하려는 목표 없이 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그것을 불가능합니다.
복음을 알고, 주님을 마음에 모신 크리스천은 지나간 어떤 경험의 느낌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지나간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일로, 그 사연으로 죄책감이나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심리학은 어린 시절에 불행한 관계를 경험했다면, 지금 불행한 삶의 원인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매일 새로워질 수 있고, 새롭게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목장모임에 가져올 나의 어릴 때 사진이나 지나간 시절의 사진을 보면 희로애락의 추억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 좋았던 나, 싫었던 나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일로 인해 지금의 내가 더 아름답게 되었다고 해석해 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은 것이 정상적인 크리스천입니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우리가 내뱉은 부정적인 말 한 번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말을 네 번 이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서로 의지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의미부여를 각인시키는 시간이 되십시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