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지만 쉽지 않고, 때로는 나에게 아픔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고, 또 내가 부정하고 싶은 ‘내가’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대부분 나의 불행한 과거나 상처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내가 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려는 의지로 인해 ‘가면’을 오래 쓰고, 혹은 억누르고, 나의 상태를 알고도 들키지 않으려고 꼭꼭 싸매고 살거나, 그 점이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지적당하고 들추어질 때 고통스러운 아픔으로 느껴집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방어기제’라고 하는데, 하나는 그 점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 잘못 봤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면서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랬던 것은 이러이러해서 그랬던 것이라는 설명을 하게 됩니다. 만들어 낸 변명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명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는 내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평생 그 자리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지적을 받고 수치를 느낀 후에 내면에서 상대방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입니다. “야!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기에? 너는 뭐 그런 문제가 없는 줄 아니? 너는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아!” 하고 공격적 반응으로 맞받아치는 것입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여서 지적하는 그 사람도 똑 같은 그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할 수 있고, 그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약점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평가하고 지적하고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역시도 가면으로 치장하고 있고, 진정한 나를 숨기고 있을 뿐이지 사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면이나 지적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마음 가운데 복수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는 내 자신의 문제를 더 이상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자신의 실상을 계속 숨기고 내가 꾸며낸 허상을 내 자신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권면과 지적을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이 성향이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를 주장하고자 하는 태도와 악한 본성과 매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고, 그냥 겸손히 받아드려야 합니다.
수용하는 것은 아픔이지만, 그럴 때 비로소 내 문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객관적으로 나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 따르지만, 그때가 치유를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피상적 교제가 아니라, 서로 삶을 나누면서 내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전 받는 자리입니다. 내 영혼을 보는 거울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내가 나를 공감하는 자리가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