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의 성숙도를 정신 연령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 성숙도와 정신 연령이 깊거나 높다는 것을 정하는 기준들이 많이 있지만, 얼마나 어려움을 참아내고 인내할 줄 아는가, 자신의 감정과 외부의 영향을 잘 다스릴 줄 아는가, 이웃의 다른 점들을 품을 줄 아는가, 하는 것들이 좋은 기준이 될 것입니다.
특히 사람과 환경에 대하여 “얼마나 멀리 볼 줄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어떤 현상만으로 그 사람과 환경을 평가와 판단을 하지 않고, 점점 되어져 가는 그 사람, 앞으로 될 그 환경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영원”이라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포함한 완전한 그림을 인생의 밑그림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악한 현실적인 문제나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까다로운 사람과의 시험들을 쉽게 이기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을 볼 때 서로 과거를 기준으로 험담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래에 이루어 질 성숙한 그 모습을 소망하며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멀리 보아야 합니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이해관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남을 쉽게 정죄 한다든지, 매사에 부정적으로 추측하는 태도, 자기와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포기하고 도망가는 태도를 고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신뢰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될 때까지는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와 사역 환경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 하고 쉽게 결론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좋아도 나쁠 수 있고, 내일 더 좋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형편과 힘든 인간관계가 있을 때는 더 좋아질 미래를 기대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우들의 과거의 허물이나, 현재의 실수나, 장래의 넘어짐까지도 넉넉히 품어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미숙하고 모자랄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부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은혜는 항상 남에게, 진리는 항상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현재의 나와, 다른 사람의 영적인 삶의 수준은 지금이 전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개선되고 성숙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사랑이란 어느 한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 관심으로서, 그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한 행동을 이끌고, 또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 준 사역이 중요해도, 서로 신뢰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으로 메꾸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먼저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특정한 사람의 마음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