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사람 안에는 여전히 죄의 경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비교우위에 놓고 싶어 합니다. 그 가시적 현상이 비판과 판단입니다. 은근히 다른 사람의 행복은 나의 비참함이 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은 나에게 다행이 되는 안도감을 느끼며 만족하게 됩니다.
문제는, 객관적으로 나의 상태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항상 점검을 나에게 두지 않고, 계속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사연을 곱씹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과 실수에 흉을 보는 비판과 비난과 험담과, 이곳 저곳 퍼 나르고 편 가르기 맛을 은근히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말하는 것을 ‘뒷담화’라고 하고, 당사자 면전(앞)에서 쏟아놓는 것을 ‘앞담화’라고 합니다. 뒷담화의 경우는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의 말씀처럼, 끊지 못하고 흥미롭게 즐기다가 무의식 가운데 인격과 영혼에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뒷담화는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있지만, 앞에서 쏟아 붓는 앞담화는 주워 담기가 아주 힘들어 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려 뒤에서 누구를 험담하고 동조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잘못을 깨닫게 되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스스로 철회할 기회가 있지만, 앞에서 쏟아 부어버리면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앞담화는 그동안 쌓아 온 존중과 신뢰 관계를 순식간에 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 입에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혹은 ‘툭 터놓고 하는 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누가 그러는데!’라고 하는 말이 서두에 나오기 시작하면, 자신 안에 쌓인 부정적이고 마귀적인 모든 죄의 경향성이 다 분출되어, 잘못을 깨닫고 나중에 사과를 한다 해도 관계회복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앞담화를 시작하는 경우는,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로 상처 입고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혹은 사실이 아닌데 자기 생각을 사실화하여 분노와 상처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로부터 한쪽 말만 듣고 그 말에 동조하여 평소 생각하는 선입견이 내면에 딱 고착되는 순간부터 경솔히 앞담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뒷담화가 많아지면 제어 못할 앞담화로 이어집니다.
말의 힘은 무섭습니다. 앞담화나 뒷담화를 하지 않는 방법은 익숙한 사람과의 관계에 경계선(BOUNDARY)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고, 성도의 축복이 되는 말들이 아니면,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동조하는 말을 더하거나 섞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면전에서 쏟아놓는 앞담화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고 보면 반드시 후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들리는 말이 내게 아픈 상처와 참지 못할 분노가 되어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어도, 뒤에 알고 보면 ‘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전해 들은 말이나 내 생각을 참지 못해 쏟아놓는 순간 마귀가 역사하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는 뒷담화도 말고 더더욱 앞담화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며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면 성령님이 모든 사실관계를 밝혀 주십니다. (장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