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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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도록 VIP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다른 교회에 출석하시는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는 권사 직분을 받은 분이 100명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교인이 200명이 안 되는 교회인데, 장로님 권사님이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작은 교회에서 권사, 장로 직분을 받고, 섬기는 것이 부담스러워 부담이 없는 그 교회를 찾아 와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알아보니 실제로 그렇다고 합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늬만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봉사와 헌신이 싫고, 한 영혼도 구원해 보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그 믿음에 대한 확신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자답해 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 대한 부담이 없고,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그 구원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인지, 냉정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을 소유했다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밧줄을 가진 자입니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 앞에서 그 밧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살인 방조죄가 성립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가는 그 사람이 밧줄을 잡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밧줄은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성도입니다. 성도는 제자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죽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주님의 교회로 초청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 예수님은 왜 전도와 선교를 명령하셨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책임을 부여한 공동체 신앙으로 VIP를 찾고 섬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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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은 큰 일 낼 소리입니다.

솔직하고 정직한 저의 마음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자신만만했던 목회를 할 때 큰 실패를 경험한 목사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목회에 자신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과거에 자신만만했던 저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쉽게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자신감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저에게 항상 조심하고 범사에 신중하며 근신해야 함을 깨닫게 해 준 것은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큰 고난을 겪어 본 다음에 제가 저를 조금씩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고, 저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서 직장에서 자신만만은 금물입니다. 자신감이 넘치고 도도한 사람은, 못하는 사람, 안 되는 사람을 쉽게 비판하고, 판단하며,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줍니다. 교만입니다. 교만해서 상대방의 장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둘이서만 아주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면서, 본인들은 주변에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산다며 자신 있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아 길러 가면서 자식 때문에 남들 앞에서 자존심 상하고,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을 때, 드디어 과거에 자신이 교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번번이 약속을 어기거나, 얌체 같은 행동을 계속할 때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며, 그 사람에 대해 흥분이 되면, 일단 내 자신이 참 미성숙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도 예외 없이 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 입장과 처지가 되면 반사적으로 개념 없는 몰염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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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통설교 하지 않는 장목사의 이유 있는 변명

교회만 가면 예배 때 설교로 호통을 맞는 기분이라며 이맛살을 찌푸린 어느 교회 성도님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같은 목사이기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직접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의 장소에 대한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에, 제가 듣기에는 호통설교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의 입장은 두 가지입니다. 제사장적 설교와 선지자적 설교입니다. 제사장적 설교는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적 설교는 호통을 쳐야 하고, 비판과 정죄를 해야 합니다. 문제는 양쪽을 다 적절히 겸비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목회는 그 균형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설교하는 목사의 감정에 달렸다고 봅니다. 호통설교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부드럽고, 듣는 사람이 호통으로 듣지 않고 따뜻한 권면으로 들리는 법이고, 사랑과 용서만 전해도 전하는 목사의 마음에 비난과 냉소가 들어 있으면 차라리 호통설교 보다 못한 겉만 번지러한 독소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호통설교보다 사랑과 용서를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성경본문이 호통을 치면 호통치고, 사랑하면 사랑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입장과 반응은 각각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율법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호통설교를 옹호하고 속이 시원하게 느끼며, 좀 더 야단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특별한 체험으로 회심을 경험한 거듭난 사람도 사랑과 용서의 설교보다 심령 안에 영혼의 독소를 드러내고 제거하도록 하는 강한 호통설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야단쳐서 변화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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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본성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 심령이 새롭게 바뀐 것을 기독교에선 새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거듭나기 이전의 심령상태는 옛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불신자는 모두 옛 본성상태 그대로 있고,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거듭나지 못했을 경우 옛 본성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 본성은 아담이 후손에게 물려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거듭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옛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천사 같아 보여도 자라면서 이기적인 모습이 보이고 거짓말도 잘하고 그럽니다. 옛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 본성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자신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옛 본성은 돈과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교만하고 이익을 위해 배신하고 무정하며 거짓되고 방탕합니다. 옛 사람은 신사적인 행동과 달리 그 마음 중심에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옛 본성의 특징을 생각할 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옛 본성 때문에 주님 뜻에 순종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저도 옛 본성이 아직도 내 안에 있어서 주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실제로는 잘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성경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겐 더 이상 옛 본성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갈2:20) 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도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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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멋모르고 목사가 되어서, 목회로 성공하고 싶은 야망에 꿈이 부풀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목회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을 아주 뒤늦게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수도 실패도 많았습니다. 상처도 많이 받았고, 작은 허물과 약함과 실패에도 양심에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죄책감과 좌절감이 생겼습니다. 그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저의 인생에 하나님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픔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픈 사람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감과 경청을 할 수 없습니다.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피할 곳 의지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아픈 상처를 품고 또 품어서 값진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용서하지 못할 것도, 원한도 의지적으로 기도하여 승화시킵니다. 많이 울어야 합니다. 아파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고통스러워서 울고, 실패로 절망해서 울어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기도의 자리에서 숨 죽여 우는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애통한 후에,울고 난 후에 열린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가능성, 성장의 가능성은 아픈 사연을 극복하면서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과 상처와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 마지막 순간에 웃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해답이라는 것을 압니다. 추락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늘을 비상하는 은혜를 체험할 때, 죽기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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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은혜교회 집회에 은혜 받고 왔습니다.

밀라노 은혜교회 집회에 은혜 받고 왔습니다. 성도님들의 기도로 예정된 이탈리아 밀라노 집회에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은혜를 끼치러 간 저희 부부가 오히려 그곳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강한 도전과 영적충전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은혜교회는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젊다는 것이 특징인데, 젊은 청년들을 섬기는 목사님 내외와 집사님들의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유학 온 청년들이 이국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정착하는 것 같아서,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중국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매주 2시간 30분을 차를 타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헌신된 청년이 있었고, 집회에 은혜 받기 위해 3시간 넘게 차를 운전해서 참석했고, 1시간 40분 거리에서 교회에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주일 친교 식사 때는, 우리와 비교하면 정말 너무 빈약한 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1유로씩 밥값으로 부담해서 다른 어려운 지역에 선교비로 헌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협력과 책임 정신에 대견함을 느꼈습니다. 주일 예배 특징은 찬양팀과 성가대가 있었는데, 모두 청년들로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한국에서 교회를 다녀 본 청년들이었습니다. 다들 성악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이지만, 연습에 연습을 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보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선교사 역할을 하셨는데, 곁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지만 밝고, 교회 사정과 형편을 말씀하지 않았지만, 목회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몇 성도님들이 목사님 사모님에 대해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 진심으로 여겨졌고, 서로 존중과 헌신이 아름다웠습니다. 교회에 일꾼 되시는 집사님들이 저희 부부를 초대해서 몇 번의 저녁식사를 대접했는데, 최선을 다하는 정성이 보였고, 정성이 들어간 그 섬김은 손님대접 인사치레가 아닌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주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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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조절에 승리해야 성령충만 유지됩니다.

감정조절에 승리해야 성령충만 유지됩니다. 신앙생활은 지,정,의 모두 중요합니다. 그 중에 감정은 예민합니다. 감정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차가운 감정, 따뜻한 감정, 미지근한 감정, 요동치지 않는 감정 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감정의 온도를 조절하는 지혜에서 빈약함과 풍요함이 결정됩니다. 그만큼 감정의 온도는 쉽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성보다 감정에 따라 선택과 결정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의존과 애착도 감정에 따라 습관적으로 형성됩니다. 존중과 협력도 감정에 따라 의지가 결정됩니다. 광고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알고 그 감정을 움직이는 뉘앙스를 다루는 천재들입니다. 물건을 사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감정을 자극하고, 어느 시점에 그 자극이 결정으로 이어질 것인지를 기획합니다. 사람마다 기본적 핵심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이 중요하지만, 감정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적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접촉하는 것과, 관계 맺는 것이 수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너무 신뢰하거나 잘못 반응하면 좋지 않는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성령충만입니다. 분노와 공격성의 감정, 미움을 표출하는 감정은 그 사람 내면에 불안과 두려움과 죄책감이 연결된 복잡한 감정 상태임을 직감적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갖도록 돕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을 먼저 잘 이해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상대방의 감정에 의지를 빼앗길 수 있고, 소통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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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본교회 직분자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의 장로 또는 집사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로부터 그 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인들을 돌보는 일이 임무였습니다. 사도들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첫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로서 성도들 가운데 칭찬을 듣는 사람을 택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직분자는 오늘날로 치면 목회를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는 순교자도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도록 복음을 전했고, 초자연적인 신비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몸 바치고,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직분은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등으로 나누어집니다만 서열이 아니고, 각기 자신이 맡은 바 사역에 헌신하는 사명자입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은 없지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교회 직분자들은 목사인 저를 포함해서 최소한 몇 가지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1. 자신이 섬기는 자라는 자기인식을 분명히 하면 좋겠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자세와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성도를 돌보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모든 교회 일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3.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우선을 두기를 바랍니다. 4. 교회를 내 가정처럼 책임지겠다는 증표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합니다. 5. 교회의 공식 모임에 최선을 다해 참석하여 모범을 보이기 바랍니다. 6.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를 바랍니다. 7.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항상 은혜로 덮어주고, 부정적인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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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 되돌아보고, 배우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 교단 CRC Synod(총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큰 도전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 참 기뻤던 것은, 우리 교회 주보 앞면에 구호처럼 기록해 놓은 “성령 충만으로 ‘해보고’ 말하는 우리”라는 말의 옳음에 대한 구체적 입증 부분이었습니다. 교단은, 과거에는 배우고, 실행하고, 되돌아보는 차원의 신앙생활을 강조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실행하고, 되돌아보고, 배우는 차원의 신앙생활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도전했습니다. “Action, reflection, learning”으로 순서를 바꾸어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너무 많이 배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배우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삶에 열매가 없게 되었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족해도 괜찮으니, 실행해 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해 보지 않으면 기독교적 앎은 헛된 종교적 언어유희라고 했습니다. 기도도 해 보고, 전도도 해 보고, 봉사도 해 보고, 섬김도 해 보고, 헌금도 드려보고, 예배도 드려보고, 해 봐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 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와 역사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세미나를 하고, 교육을 해 왔습니다. 더 철저히 배우고 단단히 배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배워도 해 보지 않음으로 인해 되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배우기만 하는 수준에 머무는 편향적이고 기형적인 신앙생활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성을 중시하고, 토론을 중시하는 교단들은 교세가 점점 줄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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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네가 옳다’라는 이해의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는 그 내면에는 이유와 사연이 있습니다. 내가 그 행동에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지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본인이 느끼고 드러내는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받아 주는 것이 공감이고, 경청의 자세입니다. 나의 생각이 틀릴 수가 있기에 겸손히 수용하고 수렴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이, 너와 나는 다름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는 것이 소박하지만 위대한 성찰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감정과 고통을 중심으로 인식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을 조롱하거나 비아냥거리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고, 영혼이 길가 밭과 같이 딱딱하게 만들 뿐입니다.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짐작은 금물입니다. 나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그 고통을 토해내고 호소하는 상대의 말을 신중하고도 겸허하게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 있어서 자격증을 소유한 자가 사람을 치유하는 것 같아도,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 깊은 관심과 배려와 존중을 해 주면, 그 시간에 감정에 아픔을 느끼는 사람을 살리는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영혼 한 사람을 귀하게 봐야 합니다. 사랑만 해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해야 내가 살고 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모르지만 이유가 있으니  [그렇지! 네가 옳다.] 이렇게 생각하고 돌봄의 자세가 되는 것은, [내가 네 편이란다] 하는 적극적 감정동의입니다.  목장에서는 말하기보다 듣기 훈련을 해야 하고, 옳고 그름의 사실관계보다 감정을 포옹하는 연습을 해야 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신앙생태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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